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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의 영국 문학사

by mysterybutler 2021. 10. 12.

16세기 역사적 배경

약 150여년에 이르는 이 기간은 급격한 변화의 시기였다. 이 기간동안 영국은 농업과 목축이 경제적 근간인 유럽의 변방 국가에서 외국에 면직물을 수출하는 유럽의 강대국 중 하나가 되었고, 가톨릭 국가에서 신교 국가로 종교가 바뀌었다. 또한 인구도 200만에서 530만으로 배 이상 늘어났고, 유럽의 여러 큰 도시 중 하나에 불과했던 런던은 파리를 제치고 유럽 최대의 도시로 부상했다. 봉건적 정치, 경제, 종교 체제에 근간을 두었던 영국이 이 기간을 거치면서 근대적인 국가로 급속하게 변해갔던 것이다. 16세기, 17세기 전반의 문학을 담을 이 장에서는 헨리 7세가 보스워즈 전투에서 승리하여 튜더 왕조를 시작했던 때부터 1485년 청교도 혁명이 발발한때까지를 대상으로 한다.

16세기

30년간 장미 전쟁을 끝내고 1485년 즉위한 헨리 7세는 중앙집권적인 근대 국가의 틀을 만들었다. 그러나 유럽의 다른 절대왕정들과는 달리 영국에는 상비군과 경찰력이 없었기 때문에 헨리 7세는 귀족들을 적절히 이용하여 국가를 경영했고, 대신을 뽑는데 있어서 문벌과 혈통 뿐 아니라 자질과 능력을 고려하는 국왕후원제를 써서 모두가 이권을 얻기 위해 경쟁하도록 했다. 또한 헨리 7세는 모든 분야를 직접 관장하고 결정함으로써 왕조 초기에 신속하게 국가의 틀이 잡혔다.

헨리 7세가 왕권을 강화함으로써 중세 말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정치적 안정을 가져왔다면, 그의 아들인 헨리 8세는 왕권 강화외에도 해외 정복에 힘을 기울였다. 그의 치세 내내 계속된 해외 전쟁은 영국에 많은 경제적 손실을 가져왔다. 왕실재정은 종교개혁에 따른 수도원해산으로 풍요로워졌으나 거듭되는 전쟁으로 그 재원은 거의 소진되었고 결국 수도원 재산들은 중간 계급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어 이들 계급의 토지소유가 증대하게되었다. 성직자들과 교회제도의 현실을 비판하면서 전개되었던 유럽의 종교개혁과는 달리 영국의 종교개혁은 왕조적 이유, 즉 적자를 얻기 위해 이혼을 합법화하려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헨리 8세는 죽은 형 아더의 미망인인 아라곤의 캐더린과 결혼했지만,자식 중에는 딸 메리만이 살아남았고 왕실의 혈통을 이어갈 아들을 원했던 헨리 8세는 이 결혼을 무효화하여 독신의 신분으로 앤 볼린과 결혼하기를 원했다. 결국 문제는 교황권이 왕권보다 우위에 있는가의 여부였고, 헨리 8세는 국왕이 영국 교회에 대한 수장권을 지닌다는 주장을 펴며 영국을 신교 국가로 만들었다. 이후 수도원을 해산하고 그 재산을 몰수했으며 세속적, 종교적인 모든 재판권이 왕에게 귀속되어 이제부터는 왕이 영국 교회의 수장이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종교적 갈등은 16,17세기 내내 영국 사회에서 가장 첨예한 문제가 되었고 19세기 이르기까지 영국을 분열시키고 위태롭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헨리 8세가 그토록 어렵게 얻었던 아들인 에드워드 6세는 어린 나이였으나 신앙심이 깊었고, 헨리 8세 시기에는 양심의 문제라기 보다는 정치적 문제였던 종교개혁이 에드워드 치하에서는 양심과 신앙에 대한 강제로 바뀌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요절하면서 이복누나 메리가 여왕이 되자 문제는 한층 더 복잡해졌다. 그 자신 카톨릭 신자이자 카톨릭 국가인 스페인의 필립 2세와 결혼한 메리는 이미 신교도 국가가 된 영국을 다시 카톨릭으로 돌이키고자 했고 그로인해 많은 희생이 따랐다. 그러나 메리의 왕권이 약했고 여론이 워낙 강했으며 메리가 후계자를 낳지 못했기 때문에 영국은 신교국가로 여전히 남게 되었다.

헨리 8세의 세 자식 중 마지막으로 왕위에 오른 엘리자베스는 국내외에서 많은 문제와 부딪쳐야했다. 대내적으로는 영국 사회가 에드워드와 메리치하를 거치면서 종교적으로 분열되었고 거듭되는 반역 음모들로 왕권마저 불안했다. 대외적으로는 외국의 카톨릭 국가들이 스페인, 프랑스와 국내의 카톨릭 세력인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여기에 로마의 교황까지 연합함으로써 영국을 고립시키는 위기상황이 계속되었다. 이런 국내외의 위기 속에서 엘리자베스는 종교적인 구심점으로 그리고 국가의 구심점으로 영국인을 단결시키는 존재였으며, 이는 엘리자베스 숭배라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종교적으로 국민들이 분열된 상황 속에서 엘리자베스는 중도 노선을 취하여 예배의 형식은 강요하되 신앙은 각자의 양심에 맡기는 방식으로 종교적인 위기상황을 대처해갔고 국내외의 위협세력에 대해 자신의 결혼을 전략으로 삼아 아슬아슬한 줄타기로 영국의 안전을 꾀했다. 게다가 앞서의 왕들이 단명했던 것과는 달리 이 중요한 시기에 여왕이 거의 50년간 왕위를 지켰다는 사실 자체가 국가적인안정에 큰 도움이 되었다. 1588년 당시 가장 강국이었던 스페인의 아마다 무적함대를 격파했던 것은 한편으로는 영국의 위세를 떨치는 사건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이제까지 국가 안보라는 대의 명분 앞에 숨을 죽이고 잇었던 온갖 문제들이 터져나오는 위기상황으로 연결되는 사건이기도 했다. 이후 16세기의 마지막 10년간은 공공재정의 궁핍으로 인한 왕령지 매각과 차입으로 왕실재정이 악화되고 특허와 독점의 폐해가 심각해지며, 노쇠한 여왕의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은 데서 오는 정치적 불안에다가 중앙 관료조직에서 부패가 더해지고 의회와 왕실사이의 갈등이 깊어졌던 한마디로 튜더왕조의 황혼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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